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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약속' 9

애나🍬

2025. 04. 07. 월요일

조회수 51

아침 안개가 아직 걷히지 않은 정원 끝.
에리엔은 벤치에 앉아 조용히 잎사귀에 맺힌 이슬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비안과의 대화 이후, 마음은 잠잠해질 줄을 몰랐다.
그저 ‘충성심’이라는 말이, 이토록 무겁게 가슴에 내려앉을 줄이야.
“여기 있었네.”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아르세인이 조용히 다가왔다.
오늘따라 평소보다 훨씬 덜 거칠어 보였다.
그의 발걸음조차 조심스러웠다.
“잠깐, 같이 걸을 수 있을까?”
에리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나란히 정원을 걸었다.
작은 말도, 숨소리도 섞이지 않는 고요한 시간 속에서.
잠시 후, 아르세인이 입을 열었다.
“…네가 어제 울었단 얘기 들었어.”
에리엔은 놀란 듯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다시 눈길을 피했다.
“그건… 그냥, 제가 조금 바보 같아서…”
그는 발끝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나도 그래. 네 앞에선 자꾸 내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헷갈려.
너한텐 괜히 더 무뚝뚝하게 굴고, 말도 함부로 하고…
솔직히, 어제는 내가 좀 질투했어.”
에리엔의 눈이 커졌다.
“질투요…?”
아르세인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너랑 라비안.
그 둘 사이에 있는 공기 같은 걸, 내가 질투하고 있었더라.
그래서 말이 자꾸 거칠어지고…
그런 내가, 너한테 얼마나 무례했는지도 알아.”
그의 말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평소의 거친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이,
마치 무너진 성벽 사이에서 진심만 꺼내 보이려는 사람 같았다.
“에리엔.
나는 너를 좋아해.
그 어떤 말보다, 그게 지금 가장 솔직한 내 마음이야.”
에리엔은 당황스러움과 놀람, 그리고 미묘한 떨림 속에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그런 말, 너무 갑작스러워요.”
“알아. 그래서 지금 뭘 바라진 않아.
다만, 나도… 너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건 알아줬으면 해.”
그는 아주 잠시, 그녀의 손끝을 바라보다가 멀찍이 떨어졌다.
붙잡지도, 다가오지도 않았다.
에리엔의 마음이 조금씩 흔들렸다.
라비안이 들려주지 않았던 말들.
그저 충성심이라는 말 너머, 듣고 싶었던 그 무언가.
지금, 그 감정을 아르세인이 꺼내 들고 있었다.
“…고마워요.”
작게 내뱉은 에리엔의 말에
아르세인은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난 조급하지 않을게.
너한테 다가가는 건… 천천히 할 수 있어.
그러니까, 날… 아예 밀어내진 말아줘.”
에리엔은 대답 대신,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움직임은 확답이 아니었지만,
거절도 아니었다.
아르세인은 한 걸음 물러섰고,
햇살이 정원 끝 나무 사이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멀찍이서 그 둘을 지켜보던 라비안은
입술을 앙다물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
“왜 난… 마음을 숨겼을까.”
그의 뒷모습엔 후회의 기색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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