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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국(중국)의 역사가 허(虛)인 이유

박은식

2026. 04. 21. 화요일

조회수 4

(중략)... 수 문제는 다행히 고구려 원정의 한계를 직감하고 원정을 취소하고 귀국하여 나라의 내치를 다졌다.
내가 생각하기에 수 문제는 이민족에 뿌리를 두고 있는 중국의 황제이긴 하지만 중국사에서 나름 괜탆았던 왕 중에 하나였던 것 같다.
하지만 수 문제의 아들 양견이 태자를 죽이고 수 문제를 시해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수 양제, 양견은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고구려 원정을 이루기 위해 중국 남북을 잇는 대운하를 건설한다.
이 대운하는 항저우에서 시작해 베이징까지 이어지는 대규모 운하였다.
백성들은 이로인해 매우 고통받았지만 덕분에 중국의 남북 지역 간 교류는 활발해졌고, 남쪽의 풍부한 물자가 북쪽으로 이송되어 굉장한 경제 발전을 이뤘다.
그리고 수 양제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원정을 시작한다.
113만의 대군을 베이징에서 출병하여 요동을 공략하는 기염을 보인 것이다.
아마 이 113만 군대의 식량 보급을 맞는 군대의 수는 이의 2배였을 것이다.
고구려의 요동성은 고구려에서 으뜸가는 성 중 하나였다.
고구려의 요동성은 놀랍게도 이 113만을 떨쳐낸다.
제 1차 세계대전 전까지 한 요새나 성이 이만큼의 병력을 막아낸 경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오기가 찬 양제는 다른 성들도 툭툭 건드려 봤지만 고구려의 성벽 자체가 안이 흙과 돌맹이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성벽에 구멍이 뚫려도 거의 타격이 없었다.
따라서 그 많고 많은 중국의 병력들은 거의 보여주기식이었던 것이다.
수양제는 우중문에게 별동대 30만 병력을 주고 다른 성을 무시하고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도록 명한다.
하지만 이 30만 병력이 평양성에 도달한다고 한들 식량보급에 차질이 생길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양제는 수군을 총괄하는 내호아에게 식량보급을 맞겨 평양성으로 출병하길 명한다.
하지만 내호아는 평양성에 도달하자마자 고구려 왕제 고건무의 도발에 넘어가 병력과 식량이 모두 작살 나버렸고, 그 이후 도착한 별동대는 꼼짝 굶을 위기에 처하자 평양에서 철수하게 된다.
평양에서 철수한 30만 병력은 청천강을 건너게 되는데 을지문덕은 병력이 강을 반쯤 건넜을 때 기습하여 이들 중 대부분을 척살하고 살아돌아간 병력은 겨우 2700여명 뿐이었다.
수나라는 이 사건 때문에 백성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멸망하였고, 관롱집단 왕조인 당나라가 그 대를 잇는다.

너무 서론이 길어졌는데, 당나라는 조병조, 부병제, 균전제 등의 정책을 실시하여 동아시아 정치 체계의 기반을 닦았고, 실크로드를 장악하여 조정은 막대한 부를 이뤘다.
또한 이들은 한나라의 영광을 되찾듯 당태종 이세민 때 몽골초원의 돌궐을 복속시키고, 나아가 당 고조 때는 고구려 정복을 완수한다.
하지만 이들의 영광은 한나라보다 짧았다.
몽골초원의 돌궐을 대체하듯 위구르 제국이 들어섰고, 동방의 고구려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안동 도호부와 백제 땅의 웅진도독부나 신라 땅의 계림도독부 또한 통일신라로 인해 축출당하였다.
중원의 한 왕조가 몽골초원을 지배했다는 건 정말 신기할 따름이었지만, 당나라는 토번과의 서역 쟁탈전과 내치의 불안정으로 인해 동방의 신라를 신경쓰지 못했고, 결국 20만의 원정군은 기벌포와 매소성에서 대패하고 동방의 신라는 과거의 고조선 시대의 치욕을 만회한다.
...
이를 볼 때 참 당나라는 한나라의 손자격 되는 나라지만, 시대적 상황 때문에 비슷한 모습을 갖췄을 지는 몰라도, 그 영광은 오래가지 못한 것 같다.
몽골초원의 유목민족들은 늘 중원의 골칫거리가 되었지만 전쟁의 신이라 불린 당태종은 오히려 이들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한나라 때 조선을 수월히 제압했던 한 무제의 수행능력과 별개로, 당나라는 동방의 조선반도를 모두 지배하진 못한다.
이는 아마도 둘 사이에 무언가 변수가 있었을 것이다.
한반도의 문명은 고조선 멸망 이후 설치된 한사군울 통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였고, 이는 한반도에 다양한 중앙집권 국가를 이루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고구려는 조선의 고토를 수복하고 엄청난 성장을 이룬 국가다.
미천왕 때 서안평을 점령해 한사군과 중국과의 연결고리를 끊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모두 차지함으로서 민족의 영광을 되찾고 나아가 대동강 유역의 풍부한 물자와 중국의 잔재로 이때부터 엄청난 성장을 이룬다.
고국원왕 때 잠시 치욕을 겪기도 하였지만, 이후 소수림왕 때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고구려의 잠재력은 광개토 대왕 때 폭발하여 한민족 역사 최초로 연호를 사용하고, 자신들만의 천하관을 이뤘다.
그러니까 한무제는 엄청난 실수를 했다는 것이다.
괜히 잠재력 있는 조선을 건드려서 그 영향을 한반도 전체에 퍼트려 나중에 중국의 큰 과속방지턱이 됐기 때문.

내가 봤을 땐 중국인들에게는 허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다음 편에는 제목과 더욱 더 관련있는 상식을 작성할 것이다.

이 글을 다 읽었다면 댓글 좀 달아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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