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1. 10.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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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는 골목 끝, 낡은 간판도 없는 서점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먼지 냄새와 함께 오래된 종이의 향이 코를 찔렀다.
"어서 오세요."
주인으로 보이는 노인이 카운터 뒤에서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은 묘하게 깊었다.
"이 서점은... 24시간 여나요?" 나는 시계를 확인하며 물었다. 새벽 2시였다.
"필요한 사람에게만 열려 있죠." 노인이 미소 지었다.
그 순간, 책장 사이에서 뭔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찾는 책이 있으신가요?" 노인이 다시 물었다.
"아뇨, 그냥... 비를 피하러 들어왔어요." 나는 거짓말을 했다. 사실 나는 '그 책'을 찾고 있었다.
노인은 내 대답을 듣지 못한 듯, 아니 처음부터 들을 필요가 없었다는 듯 카운터 아래로 손을 뻗었다.
그가 꺼낸 것은 검은 가죽으로 장정된 책이었다. 표지엔 제목도, 저자 이름도 없었다.
"이걸... 어떻게..."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신이 찾던 거 맞죠?" 노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책을 받아든 순간, 손바닥에 이상한 열기가 전해졌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책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대출은 안 됩니다. 여기서만 읽으셔야 해요." 노인이 덧붙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마지막 페이지는 절대 넘기면 안 됩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노인을 봤지만, 그는 이미 책장 사이로 사라지고 있었다.
서점 안은 갑자기 너무나 고요해졌고, 내 심장 소리만이 크게 들렸다.
떨리는 손으로 책을 펼쳤다.
첫 페이지에는 낯익은 필체로 일기가 적혀 있었다. 아니, 낯익은 정도가 아니었다.
그건... 내 필체였다.
"2025년 11월 10일. 오늘 나는 마지막 서점을 찾았다."
오늘 날짜였다. 하지만 나는 이런 글을 쓴 적이 없었다.
손이 저절로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서점 주인은 내가 찾던 책을 건넸다. 그 순간부터 모든 게 시작되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다음 페이지.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고, 3페이지에서 뒤를 돌아봤다."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카운터가 비어 있었다. 노인은 온데간데없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서점 입구의 유리문 너머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골목도, 비도, 가로등도. 그저 새하얀 공허만이 펼쳐져 있었다.
"이게 무슨..." 나는 황급히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음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밖을 봤고, 세상이 사라진 걸 알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 책은 미래를 쓰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이 책이 현실을 '만들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다음 페이지를 넘기려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았다.
"읽지 말라고 했잖아요." 등 뒤에서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거기 서 있는 건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창백한 얼굴에 긴 검은 머리.
하지만 가장 이상한 건 그녀의 옷이었다. 1920년대 스타일의 낡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죠?" 내가 물었다.
"이 서점의 이전 손님이었던 사람이요." 그녀가 쓸쓸히 웃었다.
"'이었던'이라니, 무슨 뜻이죠?"
그녀는 내 손에 든 책을 가리켰다. "그 책을 끝까지 읽으면, 당신도 나처럼 될 거예요."
"책 속에 갇히는 건가요?"
"더 정확히는, 이 서점에 갇히는 거죠. 영원히." 그녀의 눈빛이 슬펐다.
뒤에서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렸다. 책장 사이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책을 바닥에 내던지고 입구로 달려갔다.
유리문을 잡아당겼지만 꽉 잠겨 있었다. 밀어도, 두들겨도 꿈쩍하지 않았다.
"소용없어요." 여자가 뒤에서 말했다. "우린 다 시도해봤어요."
"창문은요?" 나는 사방을 둘러봤다.
"창문도, 뒷문도, 천장도 없어요. 이 서점은..." 그녀가 말을 멈췄다.
그때 책장 사이에서 나타난 한 남자가 말했다. "이 서점은 차원 사이에 있어요."
"차원?"
"현실과 책 속 세계 사이. 우린 모두 자기 이야기가 적힌 책을 읽다가 여기 갇힌 거죠." 남자가 설명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내 책을 봤다. 책은 저절로 페이지가 넘어가고 있었다.
"안 돼!" 나는 달려가 책을 집어들었다. 현재 펼쳐진 페이지에는...
"나는 탈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유일한 방법을 알게 되었다."
페이지를 넘기자 더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서점 주인을 죽이면, 이 공간은 붕괴되고 모두가 풀려날 것이다."
"그게 정말 가능한가요?" 나는 다른 사람들을 돌아봤다.
창백한 여자가 고개를 저었다. "우린 그를 본 적이 없어요. 처음 책을 건네준 그 순간 이후론."
"그럼 어디 있는 거죠?"
"찾을 수 없었어요. 이 서점은 끝없이 이어져 있거든요." 남자가 책장 너머를 가리켰다.
나는 책장 사이 복도를 들여다봤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미로처럼 뻗어 있었다.
"하지만 당신은 다를 수 있어요." 여자가 내 책을 가리켰다.
"그 책이 길을 알려줄 거예요. 당신의 이야기니까."
나는 다시 책을 펼쳤다. 다음 페이지에는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서점 깊숙한 곳, 금지된 서고에 그가 있다."
"미안하지만, 혼자 가야 할 것 같아요." 나는 책을 품에 안았다.
여자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세요. 서점 깊숙이 들어갈수록...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요."
"어떤 일들이요?"
"책 속 존재들이 나타나요. 소설 속 괴물들, 악몽 속 그림자들." 남자가 경고했다.
나는 침을 삼키고 책장 사이 복도로 걸어 들어갔다.
몇 걸음 가지 않아 뒤를 돌아보니, 입구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온통 책장뿐이었다. 천장도 책으로 가득했다.
책을 펼쳐 지도를 확인했다. "10미터 직진 후 왼쪽."
지도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걸음 소리만이 고요함을 깼다.
그런데 점점 다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책장 너머에서 속삭이는 소리.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속삭임이 점점 선명해졌다.
"...여기... 이리 와..."
심장이 빠르게 뛰었지만, 호기심이 공포를 이겼다.
소리가 들리는 책장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손전등도 없이, 희미한 조명만이 길을 밝혔다.
책장 사이 틈으로 손을 뻗었다. 책들이 차갑고 축축했다.
"왜 축축하지?" 손을 빼내 보니 붉은 액체가 묻어 있었다.
피였다. 아직 마르지 않은, 따뜻한 피.
뒤에서 '쿵' 소리가 났다. 책 한 권이 바닥에 떨어진 것이었다.
아니, 저절로 떨어진 게 아니었다. 누군가 던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재빨리 책을 집어들었다. 표지에는 '제7의 방문자'라고 적혀 있었다.
펼쳐보니 피로 쓴 글씨가 있었다. "그는 일곱 번째 희생자를 기다린다."
일곱 번째? 나는 여섯 번째 손님인가?
그 순간, 책장 뒤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그림자가 보였다.
사람 형태였지만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마치 관절이 반대로 꺾이는 것처럼.
"누, 누구세요?" 목소리가 떨렸다.
그림자가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책장 모퉁이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그것은 얼굴이 아니었다. 하얗게 표백된 종이로 만든 가면 같았다.
입이 있어야 할 곳에서 검은 잉크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여섯 번째..." 그것이 속삭였다. 목소리는 수십 명이 동시에 말하는 것 같았다.
내 손에 든 책이 갑자기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갔다.
"나는 그것을 봤다. 그리고 달렸다."
본능이 몸을 움직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뒤에서 책장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쫓아오고 있었다.
"왼쪽! 왼쪽으로!" 내 목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책에 그렇게 쓰여 있었던 것 같았다.
모퉁이를 돌았다. 복도는 점점 좁아졌다. 천장이 낮아졌다.
뒤에서 들리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젖은 종이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 잉크가 뚝뚝 떨어지는 소리.
"더 빨리, 더 빨리!"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갑자기 앞에 막다른 골목이 나타났다. 거대한 책장이 길을 막고 있었다.
"안 돼!" 나는 책장을 밀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그 종이 가면의 존재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5미터 거리.
손에 든 책이 또 뜨거워졌다. 급히 펼쳐보니 새로운 글이 나타나고 있었다.
"책장의 세 번째 칸, 빨간 책을 뽑아라."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세 번째 칸을 더듬었다. 빨간 책, 빨간 책!
손끝에 딱딱한 가죽 표지가 잡혔다. 뽑아당겼다.
'철컥' 소리와 함께 책장이 옆으로 열렸다. 비밀 통로였다.
그 존재가 손을 뻗었다. 종이로 된 손가락이 내 어깨를 스쳤다.
나는 몸을 던지듯 통로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
책장이 다시 '쾅' 하고 닫혔다. 반대편에서 무언가 책장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통과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두운 통로. 앞쪽 저 멀리 희미한 붉은 빛이 보였다.
"금지된 서고..." 중얼거렸다. 지도상으로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잠깐 숨을 고르기로 했다. 등을 벽에 기댔다가 깜짝 놀랐다.
벽이 축축했다. 손을 대보니 벽지가 아니라... 책 페이지로 되어 있었다.
이 통로 자체가 책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벽에 빼곡히 글자가 적혀 있었다.
"여기서... 읽을 수 있네." 손전등 없이도 글자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읽기 시작했다. "1923년, 첫 번째 방문자 - 에밀리 카터. 그녀는 3일째 되던 날 서고에 도착했다."
"1947년, 두 번째 방문자 - 토마스 리. 그는 5일째 되던 날 미쳐버렸다."
숫자가 계속 이어졌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2019년, 다섯 번째 방문자 - 아름. 그녀는 아직 서점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아름. 아까 만났던 그 창백한 여자의 이름인가?
"2025년, 여섯 번째 방문자 -" 그 다음이 비어 있었다. 내 이름이 들어갈 자리.
심장이 철렁했다. 그때 뒤에서 또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종이 가면의 존재가 아니었다. 여러 발자국 소리였다.
"찾았다! 이쪽이야!" 낯선 남자 목소리.
"서둘러, 주인님이 기다리신다!" 또 다른 목소리.
나는 황급히 일어섰다. 책장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통로로 누군가 들어오고 있었다. 횃불 빛이 벽을 타고 다가왔다.
"놓치면 안 돼. 여섯 번째는 특별하다고 하셨어."
특별하다고? 무슨 뜻이지?
앞쪽 붉은 빛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발소리가 뒤에서 빠르게 쫓아왔다.
통로를 달리다 옆으로 작은 틈새를 발견했다.
책장 사이 좁은 공간. 간신히 몸을 밀어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뒤에서 횃불 빛이 점점 가까워졌다. "멀리 못 갔을 거야!"
나는 재빠르게 틈새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책장에 등이 눌렸다.
숨소리를 최대한 죽였다.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들킬 것 같았다.
발소리가 바로 앞을 지나갔다. 세 명, 아니 네 명쯤 되는 것 같았다.
"이상한데, 분명 이쪽으로 왔는데..." 한 남자가 중얼거렸다.
횃불을 들고 주변을 살폈다. 빛이 내 얼굴 바로 앞까지 왔다.
나는 숨을 완전히 멈췄다. 눈을 감았다.
"여기 아무도 없어. 더 앞으로 갔나 보지."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붉은 빛 쪽으로 그들이 가버렸다.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틈새 안쪽에서 미세한 바람이 느껴졌다. 더 깊은 공간이 있는 것 같았다.
손을 뻗어 더듬어보니 뒤쪽 책장이 움직였다.
밀자 조용히 열렸다. 또 다른 비밀 공간이었다.
작은 방 같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책상 하나와 오래된 일기장이 놓여 있었다.
일기장 표지에는 "E.C. 1923"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에밀리 카터. 첫 번째 방문자.
나는 조심스럽게 일기장을 펼쳤다. 떨리는 글씨로 적혀 있었다.
"만약 이걸 읽는 사람이 있다면, 부디 내 실수를 반복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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