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0. 12.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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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햇살이 쨍쨍함과 동시에 추운 날이었다. 경실은 청록색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맞이하며 일어났다. 휴대폰 시간을 보니 오전 11시였다. 그녀는 방을 나서기 위해 방바닥에 발을 디뎠다. 강화마루로 된 바닥엔 액체가 달라 붙은 것 같은 끈적끈적한 무언가가 있었는데, 경실의 눈엔 바닥의 얼룩진 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경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방을 나서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다. 방문을 열자 늘 맡는 냄새가 났다. 어떤 요리에서나 풍기는 쾌쾌하면서도 끝 향이 달짝지근한 냄새. 그녀는 잠이 덜 깬 채 화장실로 비틀비틀 걸어가며 언제부터 저런 냄새가 풍겨왔나 떠올려 봤지만, 이내 포기했다. 그것이 지금의 행복한 삶을 바꿀만한 큰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실은 한 손을 세면대에 올려둔 채 나머지 한 손으로 가볍게 세안을 했다. 그다음 그녀는 거울을 응시하며 그날 기분에 맞게 얼굴을 꾸며가기 시작했다. 경실에게 오늘은 왠지 진한 분홍색 립스틱과 조금 더 강한 보정을 하고 싶은 날이었다. 물론 그녀가 하는 것은 실제 화장이 아닌 뷰티 25라고 불리는 가상의 꾸밈 시스템이었다. 손짓 몇 번으로 경실의 얼굴은 변해갔다.
화장실을 나서자 다시금 쾌쾌한 냄새가 경실의 코를 찔렀다. 경실은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식탁에서 김을 모락모락 내뿜는 김치찌개를 보곤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남편 윤서는 부엌에서 뭔가를 뒤집으며 경실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경실이 식탁에 앉자 윤서는 계란 후라이를 접시에 내어주었다.
“오늘 좀 예쁜데?”
윤서는 경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경실은 자신이 평소 스타일보다 보정을 조금 더한 것을 알아챈 것에 감탄하면서도 이내 부끄럼을 느끼며 말을 돌렸다.
“여보 계란 후라이 얼마나 남았어?”
경실이 윤서에게 묻자 윤서는 냉동된 계란 후라이 개수를 세어 보곤 4개라고 답했다. 뷰티 25시스템이 도입된 이후 달걀은 냉동 후라이 형태로만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15년 전 즈음이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그 당시엔 기사화조차 안 되었던 것 같다고 경실은 생각했다. 그녀는 휴대폰 쇼핑 어플을 켠 다음 냉동 계란 후라이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윤서가 식기 정리를 마치고 식탁에 앉자, 둘은 오붓한 아침식사를 즐겼다. 둘은 말 수가 많은 편이 아니였다. 달그락거리는 식기 간의 소음이 침묵의 어색함을 보완해주는 듯 했다. 하지만 그것이 둘의 관계의 문제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둘은 어느 부부보다도 사이가 각별했다.
“오늘 제설 체험 가는 날이지?”
윤서가 음식물을 다 삼키지 않은 채로 말을 꺼냈다.
“응 이따 3시에”
경실은 대답과 동시에 휴대폰 시계를 쳐다보았다. 오전 11시 30분이었다. 제설 체험은 지구 온난화로 20년간 눈이 오지 않은 대한민국에서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취미 활동이었다. 경실도 사각거리는 눈밭을 밟고 싶을 때면 매번 5만원을 지불하고 제설 체험을 하곤 했다. 윤서는 독서 모임 때문에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그의 모임에는 꽤나 유명한 작가들도 즐비했다.
일자리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현 사회는 예술인들이 마음 것 기량을 펼치기 좋은 상황이였고, 그 결과 유일하게 AI가 대체하지 못하는 직종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AI 또한 기술력은 있었지만, 사람들은 사람이 쓴 작품을 선호했다.
윤서가 현관을 나설 때 경실은 식기를 정리하다 말고 그를 배웅해주었다. 현관문이 닫히자 농도 짙은 고요함이 경실의 피부를 파고 드는 듯 했다. 하지만 경실은 그 느낌이 편안했다.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덕분이라고 경실은 생각했다.
오후 2시 30분. 경실은 제설 체험장까지 걸으며 선선한 여름 바람을 만끽했다. 물론 더 이상 계절은 중요하지 않았다. 여름이건 겨울이건 날씨는 마치 사람의 기분처럼 때에 따라 춥고 덥고를 반복했다. 하지만 그것은 경실의 행복에 별로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사실 경실은 일만 안 할 수 있다면 행복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자리를 얻기 위해 경쟁하지만 않는다면 행복해했다.
그러므로 매달 돈을 지급 받아 일자리 걱정 없는 현 사회는 그녀에겐 꿈의 유토피아였다. 경실이 매달 돈을 지급 받는 이유는 정부에서 제공한 뷰티 25 시스템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뷰티 25라고 불리는 이 가상 시스템은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인 2035년부터 정부에서 제공하기 시작했다. 간단한 시술을 통해 칩을 사용자 머리에 이식하는 방식이었는데, 시행 초반엔 정부가 왜 이 정책을 추진하는지 구체적인 이유가 없어 다수가 의심하는 분위기였지만, 뉴스와 인플루언서들의 지속적인 선전과 이식만 하면 매달 200만원을 지급한다는 정부의 제안에 하나둘 받아들였다. 경실은 이것을 가장 빨리 받아드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이상한 점은 툭 하면 경제 침체가 올 것이라고 주장하던 경제학자들도 그 당시엔 별말이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보정 된 얼굴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신기술에 눈이 팔려 이 또한 인지하지 못했다.
그렇게 경실이 목적지에 다다를 즈음, 갑자기 커다란 검정색 벤이 그녀 앞에 멈춰 섰다. 그 차량에선 건장한 남성 3명이 내렸다. 그들은 미리 계획이라도 세운 듯 행동이 빨랐는데, 한 남성은 경실의 뒤에서 입을 막고 나머지 둘은 경실의 다리를 붙잡고 들어 올렸다. 경실은 두 팔을 휘저어 보았지만, 이내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에너지 소비 활동임을 깨닫곤 벤의 좌석에 앉았다. 말 그대로 의자 위에 앉았다. 어떠한 속박도 영화에서 보았던 클로로포름을 묻힌 손수건 납치 방법도 동원되지 않은 채 그저 앉아만 있었다. 경실은 생소한 납치법에 당황해하며 그녀 옆에 둘러앉은 납치범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제각각 기괴하고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경실은 마치 바퀴벌레를 본 듯한 혐오감을 느끼곤 (물론 경실은 뷰티 25시스템을 사용한 이후 바퀴벌레를 본 적이 없다.) 육성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못생긴 인간들은 그때 처음 보는 듯했다. 그렇다. 그들은 뷰티 25 시스템을 사용하길 거부한 ‘일레귤레이터’들이었다. 일레귤레이터란 명칭은 이목구비가 불규칙하게 배치된 그들에겐 아주 적합한 명칭이었다. 경실은 어느 날 일레귤레이터들은 정부가 경계하는 위험 집단이기 때문에 발견 즉시 신고를 해야 된다는 뉴스 기사를 보았던 것을 떠올렸다. 원래 경실은 최근에 돌아가신 어머니 또한 일레귤레이터였기에 뉴스 기사를 탐탁지 않아 했지만, 이내 이들을 가리키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곧이어 현재 자신이 느끼는 최소한의 자유는 이들이 제공하는 사형수의 마지막 만찬 같은 것이라고 경실은 생각했다. 그러자 그녀는 압도적인 공포가 밀려옴을 느끼며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경실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가장 처음 본 광경은 한 남성에게 뺨을 얻어 맞고 있는 납치범들에 모습이었다. 경실은 상황을 파악할 심상이었지만 그들의 추한 모습을 보고 다시 한번 놀라 끅하며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납치범들과 한 남성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경실은 깜짝 놀라며 두 눈을 꼭 감았다.
“누나! 깨어났구나!”
그때 정체 모를 남성이 경실의 두 손을 꽉 쥐며 말했다. 경실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채 두 눈을 천천히 떴다. 위로 쭉 찢어진 커다란 두 눈, 날렵한 콧대를 가진 조각 같은 남성이 의자에 앉아 있는 경실의 두 손을 잡은 채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마엔 뷰티 25 사용자들이 가지고 있는 흉터가 없었다. 즉 그는 일레귤레이터였다. 그의 키는 올려다보는 경실의 목이 아플 정도로 컸다. 뷰티 25 사용자에게서도 흔히 보기 힘든 그런 외모의 남성이었다. 경실의 두 뺨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내 경실은 고개를 가로젓고 상황 파악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저 혹시 아세요?”
하지만 경실의 말투엔 의도치 않게 애교가 묻어나왔다. 그녀의 말을 들은 남성은 푸하하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런 뒤, 그는 삐져나온 눈물을 슥 닦으며 말했다.
“기억 안 나? 나 민철이야 박민철!”
경실은 번개를 맞은 듯 머리가 찡 하고 울렸다.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고아였던 민철은 경실의 어머니에게 거두어져 경실과 유년기를 함께한 단짝 친구였다. 그 순간 경실은 뇌 속 존재했던 안개가 걷어짐을 느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사라진 민철을 왜 지금까지 잊고 살았지? 라고 경실은 생각했다. 그 다음 경실은 안도감으로 인한 분노를 느꼈다. 그는 왜 자신에게 이런 공포를 선사했는가? 라고 경실은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할 즈음 경실의 손은 민철의 뺨을 때리고 있는 상태였다.
민철은 뺨을 맞았음에도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경실은 그런 민철을 보며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경실은 자리에서 일어나 민철을 꽉 껴안았다. 민철도 그녀를 꽉 껴안아주었다.
“미안해 누나. 정부한테 들키지 않고 누나를 만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어.”
민철에겐 상큼한 과일 향수 냄새가 났다. 민철은 가벼운 포옹을 끝낸 뒤 옷 위를 손으로 가볍게 툭툭 털었다. 경실은 순간 기분이 상했지만, 천사 같은 미소를 보이며 커피 한 잔 하겠냐는 민철의 말에 그녀는 격정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커피 한 잔을 받아 들고 테이블에 앉았을 땐 아까와는 사뭇 다른 엄중한 분위기였다. 주변은 온통 흰색 벽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마치 인체 실험을 하는 장소 같아 보이기도 했다.
“우선 본론을 말하기 전에.. 커피부터 마셔봐.”
민철의 말에 경실은 커피 마시는 것이 무슨 대수냐는 듯이 호로록 커피를 들이켰다. 그 순간 혈관 하나하나에 피 대신 커피가 흐르는 것 같은 강렬한 맛을 느꼈다. 그 맛은 긍정적으로 강렬했다. 그녀의 기분은 마치 20년만에 자신의 아이를 마주한 부모의 기분이었다. 그녀는 흥분한 채 이게 커피가 맞냐고 물었다. 경실이 평소에 마셔오던 커피와는 생판 달랐다.
“그게 우리가 아는 커피가 맞아.”
민철은 근엄한 표정으로 경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누나.. 지금부터 하는 말을 꼭 믿어줬으면 해.”
“내가 먹던 커피가 가짜였다는 것 같은?”
경실이 말했다.
“그보단 훨씬 복잡한 일이지.”
민철의 얼굴엔 냉소적인 웃음기가 감돌았다.
“누나는 뷰티 25를 이용하면서 의문점을 찾지 못했어?
경실은 곰곰이 생각하다 딱 하나 이상한 점을 떠올렸다.
" 뭐 달걀이 사라졌다는 거?“
경실이 말했다.
”뭐.. 그것도 큰 문제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 지구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은 전부 진짜 음식이 아닌 가공 대체품을 먹고 있기 때문이야.“
경실은 민철의 말을 토씨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히 이해가 안 되겠지. 17년동안 가상세계에서 살아왔으니 말이야. 내가 이렇게 누나를 데리고 온 것은 함께 이 지구를 벗어나 N0-1 행성으로 이주하기 위해서야. 그리고 한 달 뒤에 있을 선처 기간에 이주 티켓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지. 정부의 권력층은 이미 N0-1로 이주해서 산 지 오래 되었고, 이번 우주선이 이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ㄱ..“
경실은 민철의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잠깐만.. 다짜고짜 뭔 소리를 하는거야? 너가 잘 알다시피 뷰티 25는 사용자의 얼굴만 바꿔주는 시스템이지 뭐 너가 말한 것 같이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시스템이 아니야. 그런게 있었으면 나는 몰라도 내 남편은 알았을 걸?“
민철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짓눌렀다.
"물론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이게 현실이야. 누나의 눈엔 지금 세계가 살기 좋아 보이겠지만, 내 눈엔 전력이 돌지 않는 잿빛 도시로 보여."
민철의 눈은 진실을 말하는 눈처럼 보였다.
”그..그 그래서 내가 보는 세상이 전부 가짜라는 거야? 전력이 안 돈다는 건 또 무슨 말이야?“
경실은 환한 실내에서 촛불을 들고 있는 민철을 보며 말했다.
”자체 발광 시스템이지. 사람들에게 돈을 줘가며 웬만한 직업을 로봇이 대체하게 한 것 또한 최소한에 전력으로 사회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야. 현재 이곳을 포함한 모든 건물은 최소 전력을 유지한 채 암흑 속에 묻혀있어. N0-1을 발전시키기 위해선 지구의 전력이 어마어마하게 필요하거든.“
경실은 한 순간 들어온 많은 양의 정보를 정리하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몸을 비틀어가며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정리를 마치자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가 먹는 커피와 달걀이 가짜 대체품이라는거지 ?"
경실은 이해하지 못한 듯 했다. 민철은 새로운 생명체를 본 것과 같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전쟁이 나도 잠을 조금 밖에 자지 못했다고 투덜거릴 것이라고 민철은 생각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매일 밤마다 복용하는 알약을 이제부턴 복용하지 마."
민철은 더 이상 경실에게 누나라는 호칭을 붙이지 않았다.
" 그 알약은 시력 저하 부작용을 막기 위해 복용하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복용자의 기억을 미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어. 마치 한 바탕 싸우고 온 여행도 몇 년 뒤엔 추억으로 남는 것 같이 말이야."
경실이 이해를 하지 못한 듯 미간을 찌푸리자 민철은 말하는 속도를 늦추어 차근차근 설명했다.
" 달걀이 사라진 것은 인지하지만 왜 언제부터 사라졌는진 별 관심을 가지지 않지. 그건 아마 그것 없이도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테고."
민철의 말은 정확히 맞았다. 경실은 항상 어느 정도 깊이 사유하려고 들 때면 그것을 저지하듯이 행복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었기 때문이다. 경실은 이제야 진지한 사유가 가능해졌다.
"그럼 모두가 떠나면 지구는 어떻게 되는데?"
"물론 지구인들도 현재의 삶을 계속 살아갈 순 있을거야. 권력자들이 최소한의 에너지와 대체 식량은 지구인이 소멸하기 전까진 지급하기로 했거든. 물론 그들이 지구인들의 소멸을 돕는 것은 다른 문제야. 지금의 정부가 일레귤레이터들을 남 몰래 죽여가는 것은 미래에 있을 일에 비하면 빙산에 일각이지."
"정부가 시민들을 죽인다고?"
경실이 깜짝 놀라 말했다.
" 뉴스에선 보도하지 않는 현실이지. 누나가 만약 알약 복용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충격 또한 2주면 미화되어 사라질거야."
민철의 말들은 하나같이 경실을 깜짝 깜짝 놀래키기 충분했다. 하지만 아직 경실에겐 현실을 볼 수 없도록 막는 거대한 벽이 존재하는 듯 했다. 17년 동안 쌓여온 약효를 말 한마디가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삶이 만족스러워. 너 말대로 계속 이렇게 살 수만 있다면 굳이 다른 행성으로 가고 싶지 않은 걸?"
경실이 말했다.
" 아냐 그게 중요한게 아냐. 이들이 누나를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지."
민철이 말했다.
"그렇지만.. 난 그게 진실인지도 잘 모르겠고, 사람은 갑자기 죽기도 하잖아? 내가 다른 행성으로 간다고 안 죽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경실이 말했다. 그러자 민철은 말을 그만두었다. 설득을 포기했다기 보단 무언갈 깊이 고민하는 듯한 자의 모습이었다. 그의 떨리는 감정이 경실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누나의.. 어머니도 정부의 피해자야."
민철이 말을 힘들게 꺼냈다. 그의 눈가엔 눈물이 맺혀있었다.
"그게 무슨.. 우리 엄마는 댄스 모임 친구들과 여행 중에 사고를 당하신거야. 그건 확실해. 내가 전부 확인했어."
이 점 만은 경실이 포기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들은 전부 일레귤레이터들이었지. 누나의 마음도 알겠지만, 지금은 이 현실을 직시해야 돼."
민철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슥 닦은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 알다시피 누나 어머니는 나에게도 누나 못지 않게 잘해주셨어. 그래서 난 누나가 정부의 피해자가 되는 꼴은 못 봐. 제발 나랑 떠나자."
그것이 민철의 마지막 말이었다.
집에 돌아온 경실은 편안하지 못했다. 집 안을 감도는 침묵의 공기는 이제 경실의 불안감을 더하는 요소였다. 그때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윤서였다. 경실은 이제껏 이렇게 윤서가 반가웠던 적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경실은 윤서에게 달려가 윤서를 꽉 안았다. 하지만 격정적으로 표출되는 경실의 감정을 윤서는 이해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을 보는 눈치였다. 경실은 그런 윤서를 보며 순간 현실을 이해시켜야 한다는 막막한 불안감을 느꼈다.
둘은 그렇게 소파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경실은 이야기를 나눌 수록 자신의 기억이 희미해져감을 느꼈다. 추후에 경실은 기억해야 된다는 자아와 잊어버리겠다는 자아가 분열 된 듯한 느낌을 느끼기도 했다. 그럼에도 경실은 그를 이해시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그 결과 그는 잠시 동안 심각하게 고민한 뒤 말을 꺼냈다.
"그래서 내가 먹어 온 달걀과 커피가 가짜였다는 말이지?"
경실의 계속되는 설득 끝에 윤서는 취침 시간인 자정이 되어서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둘은 알약을 먹지 않기로 마음 먹고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갑작스러운 에너지 소모는 그들에게 있어 최고의 수면제였다.
다음 날, 경실은 어김없이 청록색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으로 인해 깨어났다. 휴대폰 시계를 확인해보니 10시 45분이었다. 평소보다 15분 빨리 일어난 것 뿐이었지만, 경실은 기분 나쁜 이질감을 느꼈다. 그녀는 일어나기 위해 방 바닥에 발을 붙였다. 또 다시 바닥에서 기분 나쁜 끈적거림을 느꼈다. 이번에도 경실은 바닥을 쳐다보았다. 거뭇거뭇한 얼룩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경실이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보자 얼룩은 사라져있었다. 경실은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을 바라보았다. 전날과 비교하여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만 방금 느낀 이질감이 그녀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식탁에 앉아 방금 일을 들은 윤서는 자신 또한 비슷한 걸 경험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방엔 알 수 없는 검은 물체가 슥 하고 지나갔는데, 워낙 빨라서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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