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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조용한 계절(2)

어 초밥이야

2025. 06. 03. 화요일

조회수 49

사랑하는 윤서에게.

이 글을 읽고 있다는 건, 내가 너 곁에 없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정말 미안해.

나는 어느 날부터인가 사라지는 법을 배웠어.
너를 사랑하면서도, 점점 나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
그건 네 탓이 아니라, 전부 나 때문이야.

나에겐 오래전부터 숨겨온 병이 있어.
몸의 병이 아니라 마음의 병.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 병은 조용히 날 갉아먹고 있었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있어.
잊고 싶었던 얼굴, 지나간 시간, 차가운 말들.

너와 함께 있는 동안만큼은 그 모든 게 조용히 사라지는 듯했지.
그래서 너를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깨달았어.

나는 아직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한 채,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윤서는 손끝이 떨리는 걸 느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이유가 이런 것이었을까?

책상 위 조명은 희미하게 이도의 글씨를 비추고 있었다.
글씨는 점점 더 불안정해졌고, 몇 장을 넘기자 글줄 사이엔 잉크 자국과 물기가 얼룩져 있었다.


너와 함께한 시간이 내겐 마지막 선물이었어.
웃는 너, 화내는 너, 졸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너.
그 모든 순간이 내겐 너무 소중해서, 결국 이기적이게도 도망치고 말았어.

내가 사라져야 너는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거든.
나는 병이 더 깊어지고 있었고, 너에게 말하면
너까지 나처럼 병들까봐 겁이 났어.

그리고 무엇보다
너를 끝까지 지켜줄 자신이 없었어.

윤서는 책을 닫지 못했다.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그의 마지막 말들을 조용히 되새겼다.

그는 자신이 남긴 흔적을 모두 지우려 했지만,
그의 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글씨는 살아 있었고, 그의 마음은 아직 그녀 곁에 있었다.

그날 밤, 윤서는 처음으로 꿈을 꿨다.
꿈속에서 이도는 평소처럼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그가 돌아서며 말했다.

“윤서야, 기억해줘. 우리가 함께한 그 겨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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