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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봄날, 그리고 부모님.

서현서❤️

2025. 06. 03. 화요일

조회수 38

강원도의 작은 바닷가 마을,
눈이 녹는 소리조차 들릴 만큼 조용한 아침이었다.해수는 여덟 살이었다.봄바람에 실려오는 바다 내음 속에서 엄마의 손을 잡고 모래사장을 뛰어다녔다.바다는 평화로웠고, 세상은 한없이 부드러웠다."엄마, 봄바람이 간질간질해요!"해수의 맑은 목소리에 엄마는 살며시 웃었다."그래, 봄눈처럼 조용하고 따뜻하구나.”
그 웃음은, 오래 남지 않았다.행복은 언제나 ‘봄날 햇살처럼 짧다’더니,그날 저녁, 엄마는 갑자기 쓰러졌다.해수는 조그마한 손으로 엄마의 이마를 만졌다.“엄마, 왜 이렇게 뜨거워요…?”이웃들이 몰려들고, 낮은 탄식이 오갔다.“아이고…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며칠 후, 엄마는 숨을 거두었다.
병석 위에서도 엄마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해수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단다…”해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그 문장은 마음에 콕 박혀 남았다.마치 아직 녹지 않은 얼음 조각처럼.장례가 끝난 날 밤, 해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아버지… 어머니는… 어디 가셨어요?”아버지는 눈을 감았다.한참을 침묵하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아주 먼 곳에 가셨단다. 다신 돌아올 수 없는…”그 말은 무겁고, 너무 길었다.해수의 작은 가슴엔, ‘빈 숟가락’만큼 커다란 공허가 생겼다.밥상 위에 놓인 세 개의 숟가락 중, 하나는 이제 쓰이지 않았다.해수는 그 빈 숟가락을 절대 치우지 않았다.그 자리는, 엄마가 늘 함께 앉아 있던 자리였다.마을 어른들은 속삭였다.“참 딱한 애야.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해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을 믿고 싶었다.열두 살 여름날, 아버지는 생선 장사를 위해 새벽 일찍 집을 나섰다.“오늘 저녁엔 네가 좋아하는 생선찜 해먹자.”그 말은 따뜻했다. 약속 같았다.그러나 해는 지고, 별이 뜨고, 새벽이 돌아와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마을에 소문이 돌았다.“월북했대.”“아니야, 누구한테 끌려갔다더라…”해수는 믿지 않았다.아니, 믿고싶지않았다.사람들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지만 해수는 아버지를 믿었다.‘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아버지는 그런 분이었다.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해수는 매일 저녁 언덕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속삭였다.“아버지, 오늘도 거기 계시죠?”빈 숟가락은 이제 두 개가 되었고, 밥상은 쓸쓸함만 남았다.열다섯 살,또 전쟁이 터졌다.대포 소리와 불빛이 마을을 삼켰다.사람들은 짐을 싸며 도망쳤고, 해수는 어린 동생을 업고 남쪽으로 피난했다.무너진 집, 불타버린 바닷가, 산넘어 산이였다.해수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들었다.‘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처럼, 언젠가는 이 터널도 끝나리라.그러나 피난살이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먹을 것도, 잘 곳도, 믿을 사람도 없었다.눈에 핏발 선 사람들이 서로를 의심했다.“저 자, 빨갱이 아냐?”“저 집, 먹을 거 숨겼대.”해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럼, 끝없는 복수만 남을 뿐이잖아.엄마의 말이 떠올랐다.“해수야, 말이 곱고 마음이 고와야 복도 오는 거란다.”그 믿음 하나로, 해수는 매일 하루를 버텼다.해수는 어른이 되었고, 늙어갔다.백 살이 넘었지만, 그는 여전히 매년 바다를 찾았다.가슴속엔 여전히 두 사람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TV 속 뉴스는 매일 비슷했다.분단, 충돌, 회담, 결렬…‘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이 나라는 아직 그대로였다.하지만 어느 봄날, 갑자기 뉴스가 바뀌었다.“남북, 역사적 통일 선언.”그 순간 해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었다.“끝이 좋아야 다 좋다… 엄마, 이제야 웃으시겠죠?통일이 되던 해, 120세가 된 해수는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향했다.
100여 년 동안 와보지못했던 고향, 겉으로는 3.8선 때문에 못 간다 했지만 그것은 구더기 무서워서장 못담그는소리였다. 사실은 겁이나서시작조차하지 않았다. 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까봐, 어머니와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나서... 100여년 만에 집에 가보는 해수의 손에는 천 조각이 들려 있었다.엄마가 손수 지어준 작은 배냇저고리와,아버지의 사진 한 장이 담긴 헝겊 상자.버스는 국경을 넘었고, 해수는 조용히 말했다.“이 공기… 예전 그대로야.어, 저 꽃은 어머니가 좋아하셨지... 고생끝에 낙이 온다더니 이런 날도 있구나...”얫 마을은 무너진 담벼락과 이름 모를 들꽃만 남아 있었다.그는 천천히 집 뒤뜰로 향했다.낡은 무덤 하나,이름 없는 흙더미.그 앞에 새겨진 글씨는 희미했지만 분명히 보였다.‘김한수’아버지의 이름이었다.해수는 무릎을 꿇고, 손끝으로 흙을 쓸었다.“아버지… 나 왔어요. 핏줄은 물보다 진하다고 했죠… 그 말, 맞았어요.”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언젠가 잃어버렸던 시간들이, 봄눈처럼 사라졌다.그로부터 1년 뒤, 해수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병실 창문엔 봄비가 흐르고 있었다. 마치 해수가 숨을 거둔 것을 위로해주듯이...그가 남긴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나는 단 한 사람을 기다렸고, 단 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통일은 정권이 이룬 것이 아니라, 기다림이 이룬 것이다.”그날 해수의 빈 침대 옆 창문에, 봄 햇살이 스며들었다.그리고 바닷가 마을에도, 봄이 다시 찾아왔다.‘봄눈 녹듯’ 그렇게… 아주 조용히. 해수의 길면서
한편으론 짧았던 인생이 끝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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