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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약속 37화

애나🍬

2025. 05. 06. 화요일

조회수 55

황후궁에서 나오는 에리엔의 발걸음은 무겁고 느렸다. 새벽 안개처럼 몸을 감싼 피로는 쉽게 가시지 않았고, 그녀가 막 마주하고 나온 어미의 낯선 얼굴은 마음 깊숙한 곳까지 칼날처럼 베고 지나갔다.
궁의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걷던 에리엔은 익숙한 기척에 걸음을 멈췄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있었다.
“황녀님.”
라비안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게 담겨 있었다. 무언가 묻고 싶은 것이 분명했지만, 섣불리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무사하셨군요.”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덕분에요.”
에리엔은 짧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 짧은 말에 모든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라비안 역시 그걸 느꼈는지,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
“그날 밤… 제가 조금만 더 빨랐다면,”
라비안은 손을 꽉 쥐며 말끝을 흐렸다.
“황녀님께서 그런 위험한 선택을 하시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리엔은 그를 바라보았다. 깊은 죄책감, 그리고 애틋함이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그날, 제가 마신 술잔엔… 잠드는 약이 들어 있었어요.”
그녀는 낮게 속삭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머니께서… 더는 멈추지 않을 것 같아서요.”
라비안의 표정은 그 말에 굳어졌다. 그는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에리엔은 조용히 한 걸음 다가갔다.
“혹시… 제가 틀린 길을 가게 되더라도,”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분명했다.
“그때도 저를 말리지 마세요. 전… 끝까지 갈 겁니다.”
라비안은 눈을 내리깔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혼자 두지는 않겠습니다. 어떤 길을 가시든, 황녀님의 곁에 서겠습니다.”
에리엔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건 충성이 아니었다. 그것보단 더 따뜻하고, 더 조심스러운… 감정이었다.
작은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그리고 그 침묵이 깨진 것은, 멀리서 들려온 궁인의 발소리 때문이었다.
“황녀님, 의원께서 찾고 계십니다. 조금만 검진을 받아주시길…”
“알겠어요. 곧 갈게요.”
에리엔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라비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조만간, 다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에리엔은 짧게 웃었다.
“고마워요, 라비안 경.”
그녀가 떠난 자리, 라비안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부드럽게 퍼지는 따스함을, 그는 쉽게 지워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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